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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후기

20201022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by All's 2022. 11. 28.



캐스트 - 오대석 안재영 이지현 이재균 이해준 현석준 심수영



(+) 트윗 감상

다시 왔다 내 히보.

2016년 그때 그 시절의 그 망령만을 사랑했던 건가 이제 슬퍼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걸로 됐다. 같지 않은 것도 아쉬운 부분도 좀 더 나아졌다 느껴지는 부분도 다 있지만.. 그냥 내가 사랑했던 존재가 아직 이어짐을 확인했고 내가 느꼈으니까 이미 충분해.

럿지의 펫숍오브호러즈 it's a sin 에 대해 흐릿하게 가지고 있던 그림이 명확해진 것과 함께 그리움과 이어짐과 달라짐에 대한 답을 찾았다. 넘겨줌에 대한 것도.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만들어지고 또 다시 보이고 멈춰지고 고정된 건 없다. 결국 새로운 시대와 시절에 넘겨주어야만 한다.

세상에 영원불멸할 그대로 지켜야만하는 건 없고 결국에는 모든 건 변하고 흘러가기 마련이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탐으로서 팝 역시도 문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저 소중하게 문학을 쥐어잡고만 있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간직하고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까지 무의미한 건 아니다. 새롭게 보고 이어지고 만들어지려면 다시 두고볼 수 있게 지켜지고도 있어야 한다. 딛고 일어설 땅이 있어야 새로 쌓을 수 있고 무너지지 않으니까. 포스너는 그렇게 역사를 기억하고 지켜내는 한 소년이고 그렇게 언제나 존재하는 수호자이기에 동시대를 함께 흘러가지도, 혹은 앞서가지 않아도 그 아이는 불행한 게 아니다. 그저 그렇게 존재하며 자신이 찾아낸 자기 몫을 하는 존재에게서 하지만 그 아이가 아프다는 것에 괴롭지 않을 납득에 가까운 이해를 이제 진짜 했고, 난 이제 넘겨주기도 하는 자로서 이 극을 다시 만났기에 다시 히보를 보아서 행복하다.

1막 인터미션이 끝나고 나의 히보를 드디어 다시 만났다고 했지만 처음 만났고 너무나 사랑했던 3연과의 재회를 의미한 건 아니었다. 4연 때 내가 본 날 솔직히 진짜 너무 극이 어수선하게 배우들이 들떠있어서 괴로워서 상처받았었다. 그 상연 전체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이 너무 괴로웠다. 너무 괴로웠기에 다시 만나는 걸 포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올해 다시 보길 선택해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냥 슬픈 기억의 상처만 붙들고 아파하고 있지만 않게 되어서 이제 다시 히스토리 보이즈를 떠올리면서 행복할 수 있다.

2016년 처음 만났고 사랑이 시작되었던 때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하고 받았던 감동과 내가 만났던 때에서 시간이 흐른 만큼 새 시절의 호흡을 가진 배우들을 보면서 이렇게 극이 넘겨주고 받음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사랑하던 극들이 다시 올 때 예전과 온전히 같지 않음에 슬퍼하던 것도 오늘을 기점으로 이제 조금은 덤덤하게 인정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히보가 극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극 자체로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를 오늘은 이야기와 세상은 흘러가야만하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만 정말 온전히 단단히 흘러가려면 간직함 또한 있어야한다는 아이러니로 받았다.

어윈에게 데이킨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하며 헥터에게 이야기하면 위로가 될 인용구를 주겠지만 자신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니라고 했던 포스너가 모든 이야기를 간직하고 기억하고 되새기기도 하는 이가 된 건 핫지를 통해, 문학이 그저 위로가 아님을. 헥터마저 위로로 쓰고자 했던 그 문학 속 자신의 발견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 사이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간직한 이야기와 과거의 말들이 결심을 위한 계기가 될 흔적이 될 수 있음을 그 아이가 오롯이 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케임브릿지에 가서 그 곳의 달려가는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그건 자신의 고통을 끝낼 답이 아님을 찾았을 뿐이다. 소수성을 응집한 자신이라는 존재가 겪는 고통들의 답은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그 고통을 그냥 그 흐름에 맞춰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답.

포스너는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케임브릿지에 가면, 데이킨이 혹시 날 바라보면, 그저 지나가기만 바라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흔들던 고통이 끝이 날까 아파하던 고등학생 포스너는 케임브릿지를 졸업하지 못 했고 데이킨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아도 이제 불행하지 않다. 남들이 보기에 주기적인 신경쇄약을 앓는 그 사람이 번듯하지 않다고 해서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고통을 그냥 잊거나 옛 기억을 쉽게 되살리지도 못 할 사람이 아닌 걸.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불행하지 않은 나날까지 나의 고통을 만나가는 포스너는 용감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것에 주눅들어있던 한 소년이 북치는 핫지라는 시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달려가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나를 찾는 것이 가능함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남들은 안쓰럽게 보는 그가 스스로는 그렇지 않음을 아는 강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묵묵하게 그려낸 이재균 포스너의 오늘이 아름다웠다. 헥터가 준 가르침들을 모두 기억하지만 그는 헥터의 아이가 아니다. 포스너이다. 무엇인가로 기억되기를 바라지도, 또 자신이 안고 있는 것들 자체에 집착하지도 않고 지키는, 하지만 멈춰있는 건 아닌. 그는 자신이 지키는 것들 앞에 멈춰있지 않고 그것을 안고 걸어가고 있다. 넘겨받았고 지키고 또 넘겨줄 그 자체로서 히스토리 보이즈의 이야기 그 자체였던 이재균의 포스너를 보았음이 참 다행이다 좋았다 행운이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있었고 그가 있던 자리에 내가 있었고 그게 나에게는 가슴으로 남을 것이다.

극이 그걸 의도한 건 솔직히 아닐텐데, 히보를 추억하려고 할 때 이름을 말하기 괴롭게 하는 사회면 진출한 배우들과 또 납득할 수 없는 헥터의 성추행 행위가 걸려서 힘들던 부분들이, 헥터가 교장실에서 나와 포스너에게 핫지로 수업을 하던 과정 중에 그 이야기를 전하는 대상이 결함이 있다고 해서 사랑했던 순간이 있거나 사랑하고 있는 내가 괴로워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헥터가 학생들을 추행한 쓰레기라고  해서 헥터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시가 쓰레기가 되는 건 아닌데, 연기한 배우가 쓰레기였대서 이제 그때 행복했던 순간을 후회하며 날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헥터든 각종 범죄나 물의를 저지른 배우들이든, 그리고 그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을 그들의 공으로 과를 없애서도 안 되는 거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추켜세울 필요가 없듯이 그 존재들로 날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 연결지어서 헥터가 학생을 성추행한 쓰레기인 것에 끝까지 분노하는 존재로 린톳 하나만을 둔 건.. 그리고 그 분노를 이전에 비해 격렬하게 말하도록 바꾼 건, 솔직히 극 전체에서 오히려 이야기의 균형을 깨는 수정이라고 생각하게 된 깨달음이자 결심이기도 하다. 분노하는 존재가 단 한명인데 그 존재는 온통 남자들이 나오고 이야기하고 제목마저 '히'스토리 보이즈인 극에서 남탕 세상과 역사에 한번씩 격분하는 몫을 혼자 감당하고 있는데 거기에 분노까지 혼자 하게 하는 거, 남자 위주의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까지 말해도 남자 절대 다수극이라는 히보의 한계를 더할 뿐이었다.

전에는 히보를 완벽하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히보를 완벽하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앞서 린톳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증명하는 히보의 결점이 우스워질 만큼 성별로 인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사라진 세상이 오기 전까지는 극 내의 성비 불균형마저 그 자체로 참 세상과 닮은 이 극이 린톳에게만 자꾸 욕먹을 거리에서 까임방지권을 획득할 거리를 더 얹어가며 세상의 변화에 발 맞추려고 한다는 '장식'을 얻으려고 한다는 게 오늘 공연에서 다시 감동을 얻었다고 해도 비겁하게 여겨질 뿐이다. 히보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완벽함을 말하는 극이 아니기에 애매하게 욕먹을 거리를 차단하려는 시도와 그걸 한 인물에게만 몰아넣는 선택이 극의 균형을 깨며 완벽하지 않은 건 나쁘고 비겁하다. 이 극에서 이야기되는 존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 자체가 용서받거나 이해받지 못할 것은 아니듯 죽어버리고 지나버린 자인 헥터에 대해서 미움없던 이야기를 그대로 살리거나, 극 안에서 린톳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헥터에게 만진 건 만진 거라고 분노하고 돌아선 뒤가 애매하게 정적이 흐르지 않을 만큼 더 깊이 고민하고, 또 제발 용납하지 않았던 자의 고민을 가뜩이나 까방권으로 기능하는 한 인물에게만 몰지는 않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모든 십자가를 린톳에게만 짊어지우는 건 게으르다. 내 눈에는 그랬다. 교장과 린톳은 이 극에서 아이들의 졸업 시점 이후 미래의 삶이 그려지지 않는 단 두 인물이고 그건 애초에 극에서 생각의 전환점 제공이나 분위기 환기를 위해 한번씩 송곳을 찌르는 기능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극 자체에서 린톳의 미래를 말하지 않는 건 메시지 그 자체를 담는 존재라기보다는 그렇게 분위기 환기를 시키는 기능적 존재일 뿐이어서다. 린톳이 이야기하는 말들이 나를 비롯한 여성 관객이 남성만 판치는 세상에 대한 억울함 그 자체라 사랑받고 나도 사랑하지만 극 자체에서 애초에 더 이상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던 인물에 사랑받는 존재라는 이유로 의도함이 없었기에 정돈될 수 없는 수준으로 용납할 수 없던 자의 분노를 담는 건 오히려 이번에는 린톳을 존중하지 않는 걸로 느껴졌다. 린톳은 히보가 내재한 불쾌함을 끌어안고 대속하는 십자가를 진 예수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더 좋고 옳은 방향에 대한 제시는 할 수 없다. 그런 내공도 없고 난 관객이니 그건 내 몫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지만 헥터에 대해서 마땅히 분노할 수 있고 그를 감싸지 않는 법에 대해 린톳에게 십자가는 그만 지우고 더 깊고 근본적인 고민을 통한 노력을 하길 바란다는 감상은 남기고 싶다.

다시 사랑을 되찾은 극이 애매하게 게으르고 비겁한 방향으로 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얹어본다. 더 노력해주세요. 계속 또 사랑하고 싶습니다.

배우들 얘기를 조금조금 남겨놓아야 나중에 곱씹기 좋겠지. 오늘 히보를 보면서 많은 배우들에게서 아 이 사람들은 밀레니얼이고 나랑은 다른 호흡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 느낌을 제일 많이 받은 배우가 해준 데이킨이었다. 헥터는 말이 안 되고 어윈마저 이 아이보다는 옛날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세상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정말 당연하고, 그리고 모든 게 정복거리이고 정말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필요를 가질 마음도 없는 사람이라 오히려 슬픔의 기색을 가진 데이킨들보다 더, 난 해준데이킨이 참 슬펐다. 어윈의 휠체어를 보는 게 끔찍했다면 고개를 완강하게 저어버리는 그 애에게 어윈이 정말 낯설고 재미있는 정복 거리였다는 게 다가왔달까.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서 어윈과 일요일에 약속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데이킨의 삶의 방향은 바뀌진 않았을 거야.

그저 흥미롭고 손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번 좀 남다르게 고민하고 더 노력했던 사춘기의 어떤 치기라는 게 어윈에게 발휘되었을 뿐이라는 게, 이 잘생기고 똑똑하고 아쉬울 거 없는 애에게는 슬픔이나 고통을 온 마음을 다해 느끼고 지날 순간마저 인생에 없을 거라는 증명 같아서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줄 아는 것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나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슬프게 다가왔다. 그 허정함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앞으로도 쭉 없어왔을 데이킨이 허정하다는 것이 그저 나만 슬플 것이라는 게 참 웃기지만, 나는 그게 참 슬펐네.

어윈 설득할 때 너무 그렇게까지 열심히 안 해도 될텐데 싶은 거랑 목소리가 작은 건 좀 아쉬웠는데, 과거는 흘러간 시간일 뿐, 문학은 위로의 수단일 뿐인 그런 사람을 정말 쌈박하게 그려내서 가능한 안쓰러움 재미있었다. 난 깔끔한 사람이 좋아.

현석준 스크립스는 정말 피가 뜨거운, 굉장히 운동권 재질의 사람이라 보는데 굉장히 찡했다. 너무 마음이 뜨거워서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버려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면서요라며 어윈과 헥터의 합동 수업 첫 날 분노하던 마음도, 세상이 참 쉽고 다른 이의 마음도 쉬운 데이킨도, 그리고 그런 데이킨과 세상의 모든 것에 아픈 포스너도, 한발짝 떨어져서 지켜보고 기록해서 내 소재로 그냥 간직하기에는 모든 것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분노하고 애틋해하는 사람인 걸. 품이 넓고 따뜻한 사람이던 강우리피 생각이 조금 났다. 강우리피가 마음이 꽂히는 지점이 사람이라면 석준리피는 세상이지 않을까 싶고, 본인은 기자가 된 게 싫다해도 피가 너무 뜨거워서 사회면 고발기사 취재 미친 듯이 다니며 헥터의 어깨를 감싸주지 못 했던 순간 같은 마음 속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뛰어다닐, 그런 모습이 떠올라서 찡했다.

재영어윈, 내가 학생들이랑 나이 차이 크게 안 나는, 정말 어려서 어려보이는 어윈을 상상하며 기대했던 모습이라 오늘 대사 솔직히 버벅댄 부분 좀 많았는데ㅋㅋ 그래도 좋았다. 침착하고 똑똑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노력하지만 그래봤자 사회 초년생이고, 20대 중반도 안 되었을 사실은 서투를 수 밖에 없는 청년이라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새로운 세상 속에서 덜컹거리던 20대의 어윈과 아마 10년은 넘게 흘렀지만 아직 20년은 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망가져버린 다리와 함께 마음 한 구석에 처박혀있을 상처를 온전히 닫지는 못 해 포스너의 방문으로 벌어져버렸던 30대의 어윈의 차이가 섬세해서 좋았다. 그래봤자 20대 청년이었을 때니까 흔들렸어도, 서툴렀어도, 아팠어도 되는 건데 그런 과거에 대한 수치심과 슬픔이 없는 척 하는데 척 해야 할만큼 또 확실히 남겨진 게 행복하지 않음의 상징으로 어윈이 보여지게 한다는 게 참 극으로는 좋은데 안쓰러웠다.

극 전체 후기에서 린톳한테 너무 다 맡기고 짊어지우려는 거 나쁘다고 썼지만, 근데 그걸 하는 지현린톳은 너무 잘하시고 좋아서 또 보는데 와... 잘하신다 참 좋다 한 게 스스로 좀 웃펐다. 참 남자들끼리 자기들이 뽐내서 신이 나서 살아가는 역사 속에서 바로 그 역사를 가르치면서 불합리함을 느끼지만 살아내기 위해 적응하며 그저 살기 위해 누르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도저히 누를 수 없어서 터져나올 때의 억울한 분노가 날카롭게 제련된 식어버림이 아니라 아직도 불타는 뜨거움이라 내 가슴이 같이 타들어가버리는데.. 이걸 시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너무 아는 온도라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윈에게 교장과 헥터에 대해 말하는 냉소도 사실 모든 걸 겪어낸 뒤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아직 겪어가는 자의 현재 진행형인 걸. 그리고 특히 모의 면접 때 그렇게 뜨겁게 분노하는데, 그 뜨거움이 학생들에게는 린톳 오늘 참 이상해 수준으로 지나갈 거라는 게.. 참 세상 자체였다. 그래서 더 린톳의 이야기를 완전히 더 새로 빚어내지 못할 거면서 헥터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게 해놓은 게 화가 났던 것 같다. 배우가 이렇게 끓어오르는 인물을 가져오게 이것저것 추가는 했는데 중요한 마무리가 없어서 그냥 흘러간 목소리로, 아직 아픈 사람을 두었다는 게 속상했다.

아 근데 오늘 보는데 석준리피가 하느님이라고 해서 기독교인이 본인들의 유일신을 말할 때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애국가의 하느님이랑 다른 거 아닌가 했는데 하느님 뜻 사전에서 2번째에 하나님 포함이라 맘이 좀 편안해짐. .....은 근데 하느님 2번 뜻 가톨릭 여호와....라고 다시 읽어보니.... 스크립스 다니는 거 교회였지 않...나... 우리 동네에 천주교회라는 곳이 있는데 그런 거라고 자체 합리화 하면 되는 걸..까ㅠ 

스크립스가 다니는 교회가 성공회 교회이고 개신교 계열이지만 가톨릭 포맷이 많이 유지된 교파이고 한국 성공회에서 호칭을 하느님으로 쓴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신 분이 계셔서 거대 물음표 얹혔던 거 쑥 내려갔다😆 아 시원해..
살 것 같다☺

이재균 포스너가 헥터와 어윈의 첫 공동수업날 홀로코스트에 대한 오고감들이 끝나고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내고 그것을 챙겨나가던 때의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태도가 계속 머리 속을 맴돈다. 그저 잊고 지나가지 않는 그 사람의 삶의 선택의 첫걸음을 내가 엿본 건 아니었을까 싶던 순간.

그리고 온도가 다른 연기 잘함의 깨달음은ㅋㅋ 혼자 서있지 않은 장면에서 작음을 연기하는 그 꼼꼼함이ㅋㅋ 몸을 쭉 펴는 일이 거의 없는 건 물론이고 책상에 앉거나 해서 길이를 줄여버리는 꼼꼼함ㅎㅎ 몸 접은 티 안 나게 몸을 어쩜 그렇게 잘 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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