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트 - 김학선, 정재은, 정승길, 이영석, 호산, 이명행, 조윤미, 조영규, 채윤서, 이정훈, 김명기, 손고명, 유병훈, 견민성, 김성현, 강대진, 김영노, 홍의준, 남슬기, 김민서
공연장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개인적으로 실제 무서운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극을 피하는 편이다.
그런 공연이나 여타 미디어들이 별로라는 게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임을 느끼는 심적으로 보고나서 많이 힘들어서.
푸날도 그래서 볼까말까 고민했고 양도까지 해보려다가 봤는데 보기를 잘한 것 같다.
울기는 많이 울었는데 메시지가 단단해서 내 맘도 잘 단도리하고 나올 수 있었다.
푸날 초반 부분에 희극적이라는 걸 이미 알고 갔는데도 딱히 안 거슬리지는 않았다.. 거슬렸다는 이야기임..
못 만든 개그 코드는 아니고,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다고 꼭 진중할 필요는 없다만 내 취향 개그 코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억지로 관객들 웃기려고 넣어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잘 계획된 느낌이라 극에서 겉돌지 않았고, 앞에서는 웃을 일이 많다가 비극적인 역사와 인물들의 감정이 나오기 시작하니 대비가 되어서 좋았다. 심각한 장면 뒤에 잠깐씩 웃긴 포인트가 나오니까 울다가 피식하고라도 웃어서 감정적으로 버틸 여지가 생기기도 하고.
주인공인 민호는 참 지금 우리 젊은이들 같던 푸른 날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겁도 많고 시절에 맞게 행복하고 싶고 사랑도 좋고 우정도 좋고 내 학생들도 예쁘지만, 세상의 불합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게 아닌 걸 알지만 개죽음도 무섭고 폭력도 같은 사람되는 것 같아서 싫고, 희생양이 내가 아끼는 사람들인 건 더더욱 싫고.
하지만 그렇게 정의롭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죽으면 개죽음이라고 주창하던 사람이라도 진짜 눈 앞의 참상을 보고 겪고, 거기에 눈 감고 변절을 통해 살아남았을 때 얼마나 많은 상흔을 입는 지 잘 알려주는 인물이었다.
살기위해 기준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조서에 동의하고 풀려났지만 살겠다고 버린 기준이 등 뒤를 눈앞을 맴돌아서 죄스럽고 미안하고 자신이 부끄럽고 세상에 부끄럽고 그리고 그래서 화가 나고. 남들도 다 나같을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내뱉어봤자 스스로 이미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인간인지 알고 있지. 결국 그렇게 기준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서 오민호를 버리고 여산으로 속세에 인연을 끊고 살고자 했지만 외면해버린다고 편해질 수는 없다는 걸 30여 년이 지나서 여산은, 민호는 결국 인정했고.. 운화의 결혼식에 가서 아이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시켜줬다. 그리고 민호가 출가를 결심한 뒤 사라졌던 기준이 운화의 손을 잡고 민호가 신부입장을 한 뒤 정혜와 나란히 서 있을 때 다시 나타나 한 발 한 발 걸어와서 정혜와 민호 사이를 가로질러 운화에게 갔다.
그 의미를 내가 잘 해석한 게 맞을까 싶지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수치스러운 변절을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없던 삶이라고, 없던 일이라고 무시해봤자 아무 것도 진짜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인정하고 잊지 않고 받아들이고 더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만이 진짜 상처를 극복하는 법이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본 것 같던 장면이었다.
극 중에 기준을 출가시킨 큰 스님이 넘어진 곳을 다시 짚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운화에 대한 그리움과 부정을 인정하고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운화의 신부입장하는 손을 잡아주면서 여산은 민호로서 이전에 떠나고자 했던 비겁하고 아팠던 변절을, 부끄러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진짜 그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삶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직면하고 싸우자니 답이 없어보이고 나만 손해일 것 같은 상황과 세상을 외면해봤자 나에게 남는 건 민호가 출가를 해서도 결코 놓지 못했던 부끄러움 밖에 없지 않을까. 꼭 내 삶을 다 바칠만큼은 아닐지라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만큼 내 눈앞의 현실과 내 주변의 고통, 이 세상의 부조리에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피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합리화하지 말고.
그리울 때는 그리워하고 부끄러움은 부끄러워하고.
그렇게 살자라는 이야기를 잘 전해준 좋은 극이었다.
굉장히 정치적인 뉘앙스로 읽힐수도 있다만, 꼭 정치적인 게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대한 부끄러움에도 해당되기도 하니까 정치적일까봐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재작년인가 국립극단 개구리 보고 아주 노골적이고 못 만든 정치극으로 느껴져서 보고 나서 기분 꺼림직했는데 푸날은 그런 거 없이 잘 보고 나올 수 있었다. 부끄러움을 무시하고 살면, 그에 대해 쌓이게 되는 아픔이 그 사람 자신의 삶과 꿈을 어떻게 고통을 주는 지 느껴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덧붙이면 배우들 연기도 좋고 무대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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