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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후기

20150620 연극 프로즌 낮공

by All's 2016. 3. 10.



캐스트 - 이석준 우현주 정수영
공연장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한 순간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얼어붙음 속에서 벗어나야 함을, 혹은 그렇게 만든 상처를 인정해야 한다. 알아도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그 것에 대한 이야기.

낸시, 랄프, 아그네사. 모두 차마 인정할 수 있는 무거운 상처, 혹은 죄책감 등에 매여 그렇게 망가진 채 맴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보는 것조차 짓눌리는 듯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짊어진 배우들의 힘이 멋진 작품이었다. 모든 것이 과하지 않고 인물들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집중되어 있었다. 무대 속에서 비닐의 사용이 어떤 시각적 효과와 의미를 표현하는지는 알겠지만 미학적으로 나에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가장 궁금한 인물은 아그네사. 그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보고 싶은 건 가장 숨겨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범죄가 악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죄, 병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증상이라고 말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랄프에게서 학대의 증거와 망가진 부분을 찾아내는 아그네사의 행동은 데이비드와의 불륜이 옳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아이러니하다.

당신을 알고 한 것이니 끝까지 괴로워하라는 낸시의 말처럼 아동살해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일이 아닌 게 아쉬울 뿐인 랄프와 달리 아그네사는 분위기에 휩쓸렸다해도 그 행동이 윤리적이지 못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그네사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 알고 저지른 죄와 판단할 수 없게 망가진 뇌를 가지게 된 인물들의 병증적 증상에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첫 장면. 비행기를 타기 힘들어하며 발작하는 아그네사의 행동이 어릴 적 어떤 트라우마에 의한 것인지, 데이비드의 사고 이후의 증상인지 극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없기에 아그네사가 랄프처럼 망가진 곳이 있는 자인지, 아닌 지는 분명치 않다. 낸시의 독백 속 낸시의 딸이자 로나의 언니인 잉그리트의 역할을 순간순간 수영배우가 한다는 것이 동생의 실종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결핍을 가진 잉그리트처럼 아그네사 역시 상처가 있는 인물인지, 아니면 그냥 도구적 차용일 뿐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게 아그네사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그네사, 랄프, 낸시 셋은 모두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는 면면을 보인다.

자신이 성폭행하고 살해한 아동들이 자신이 부모에게 당했듯이 아팠을 것이란 걸 알게 된 랄프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고, 한 남자와의 데이트를 즐긴 뒤 잉그리트에게 그 상황을 들킨 낸시는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끼지만 랄프의 장례식 때는 그 동안 많이 슬펐으니 이제는 기쁘고 싶다고, 웃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자신의 죄책감과 고통에 대해 행위의 방향을 선택한 둘과 달리 아그네사는 자신의 친구이자 데이비드의 아내였던 메리에게 데이비드가 죽기 전 그와 저지른 불륜에 대해 메리에게 말하는 게 좋을 지 아그네사에게 묻는다.

자신의 죄책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아그네사.
로나의 고통을 알게 된 뒤 발작하는 랄프에게 난 낸시와의 면회를 허락한 적 없으니 당신의 고통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도망치듯 떠나버린 사람이기도 한 사람.
다시 본다고 아그네사에 대한 의문이 풀릴 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고, 알고 싶다.

석준배우의 랄프는 아그네샤가 강연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악에 대해 논의해야할 난제. 알고도 행하는 죄와 학대로 인해 망가진 이들이 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한 악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인물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가해진 정신적·육체적 학대로 똑바른 것, 깨끗한 것에 대한 결벽과 강박을 가졌지만 그런 강박과 학대 속에 갇혀서 진짜 사회적인 죄와 악행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게 망가져버린 인물.
자신의 안에 갇혀있고 타인에게 제대로 공감하는 능력이 망가져있는 자폐적인 증후를 끊어지는 말투와 반복되는 결벽적인 손씻기, 로나를 향한 무감정한 표정의 계속된 인사 등으로 표현해낼 때 그 사실적임이 랄프의 망가짐, 그 자체인 것 같아서 배우는 관객들이 랄프를 동정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참 가엾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랄프를 감싸고 싶다거나 그의 범죄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에서 학대의 피해자인 랄프와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면서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괴물인 랄프 사이의 균형이 잘 잡혀있었기에 석준배우의 랄프가 매우 좋았다.
그리고 그런 이중적인 인물인 랄프를 단적으로 드러낸 테이블씬이 그 끔찍한 만큼이나 인상적이었고 강렬했다.
데이비드의 음성에 무너진 아그네샤에게 다가갔다가, 그동안 그가 같이 놀기 위해 데려왔던 아이들에 아그네샤가 덧씌워진 듯 아그네샤를 향해 아이들에게 했을 말을 퍼붓다 테이블에 자신의 성기를 쳐박으며 대사를 쏟아낼 때.
한 사람 한 인물이지만 아이들을 성폭행하는 랄프와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하는 랄프가 동시에 느껴져서 랄프가 혐오스러우면서도 랄프가 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어서 잠시 눈을 감기도 했다.

그렇게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동안, 감정과 판단의 사고가 철저히 망가졌던 랄프가 낸시와의 만남으로 자신이 아이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을 줬다는 걸 알게 된 뒤, 그리고 그 죄의 무게에 고통을 느끼다 결국 죄를 감당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피해 죽음이라는 행위로 도망치는 건 죄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어떤 무게감을 가지는 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극적이지만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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