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연/후기

20161025 연극 두 개의 방

by All's 2016. 10. 26.


출연진 - 전수지 이승주 배해선 이태구
공연장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참으로 슬픈 거구나.'라는 게 먹먹했던 시간.

좋은 이야기는 어떤 곳의 상황도 관통하는 메시지를 가진다지만, 노네임의 극들은 그 극의 국가적 배경을 지우거나 로컬라이징하지않고 그대로 표현하는데 그 낯설음이 참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만으로 혜택을 받은 미국인, 그 곳에서 태어나지 못 했다는 것 만으로 끝없이 변두리이고 뒤쳐졌고 낙후되었다는 현실을 깨달아야만하는 그 어딘가의 나라들. 그래봤자 모두 거대한 한 시스템 속의 부속물이고 그 어떤 것도 그저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선택받은 미국인 관객들에게 우리는 낙원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 또한 세상의 한 부속품이고 그 무엇도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원작자가 부여한 혜택의 경계에 발이 닿을 듯 말 듯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바라본다는 건, 레이니와 마이클, 혹은 엘렌의 속마음까지 바라보며 한 번씩 가슴이 무너지는 것과는 별개로 말그대로 부외자가 된 듯 한 오묘하고 붕 뜬 듯한 소외감.. 비슷한 걸 느끼게 해줬다.

레이니가 마이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는 것, 그리고 레이니의 그 시간 동안 계속 마이클 또한 그녀를 잊지 않고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헌신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그 모든 것들과 그들과 닿지 않는 세상들이 모두 자신의 '무엇'을 위해 헌신하지만 노력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 보는 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세상이 짜인 틀 안에서 하나의 소리를 낼 수 없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한 개인이자, 또 그 나라마저 그런 국가의 국민으로 사는 입장에서 의식과 무의식 어느 쪽으로든 깨닫고 있던 현실을 그걸 의식적으로 짚어줘야 충격을 받을 국가의 국민을 대상으로 '너희들 이거 알아야 해'라고 쓰여진 극을 통해 본다는 게 굉장히 뭐랄까...

너희는 이걸 이렇게 짚어줘야 하는 거구나.라는 맘이 들어서 서글펐던 것 같다.

뭐 그렇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극의 방식과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이 나쁘지 않았기에 극 자체는 좋았다.

보기 전에 암전이 잦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걱정을 했는데 이 극에서의 암전은 마이클과 레이디가 서로를 느끼는 통로이기도 하고 관객인 나 또한 순간 순간 닥치는 어둠 속에서 그들을 느끼고, 또 그들이 처한 아픔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쉴 수 있는 타이밍이기도 했던 것 같아 괜찮았다. 과학이라는 게 조금도 자연스럽지가 않은데 자연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게 이상했다는 레이니가 습지에서 관찰한 새들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찾고,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과 마이클을 발견한 것과 마이클이 차 속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느끼다 모든 건 그저 그렇게 돌아갈 뿐이라는 알아차린 것마저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먼 거리를 떨어져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그리고 삶을 이해하는 구나. 싶어서 그게 참 아름다우면서도 너무나 슬퍼서, 정말 많이 슬펐다.

같은 맥락에서 되돌아 생각나는 극 초반 마이클의 이야기 또한 참으로 아름답고도 슬펐다.

레이니의 발가락이 모래사장에 파고드는 모습을 보며 바다거북을 만났던 마이클. 알이 부화하고 새끼가 커서 안전해질 때까지, 모든 가족이 함께 다시 만날 때까지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한 쌍의 새들을 보며 마이클과 자신을 생각하는 레이니. 극 전체를 생각하면 차가운 메시지를 가진 무거운 극인데, 마이클과 레이니 사이에 흐르고 그들을 감싸는 유대감과 사랑이 깊고 아름다워서 따뜻하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시각적인 것들이 극도로 배제된 극 안에서, 이 둘의 말을 통해 그려지는 세상의 모습, 자연의 모습에 대한 묘사로 전해질 수 있는 무한한 상상 속의 이미지는 그 한계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다 전에 봤던 배우들이고 전수지 배우는 처음 뵌 분인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좋고 발성도 단단하고 멋졌다. 레이니가 등장해서 입을 여는 순간 목소리랑 대사톤이 정신이 번쩍 들만큼 너무 좋으셨다. 보드랗고 부드러운 생김새가 승주배우랑 계열이 비슷하셔서 둘이 또 그렇게 닮아있다는 느낌까지 좋아서 참으로 참으로 이번 캐스팅이 흐뭇했고.. 좋았고... 레이니랑 마이클 생각하면 또 맘이 아프고 하여간 여튼 좋았다.

승주배우랑 해선배우는 잘하는 분들이 여전히 잘 하시는 구나라는 감상이었고, 승주배우의 역할의 한정성에 대해 내맘대로 걱정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타고난 생김과 스타일 속에서 유의미한 변주를 조금씩 더 내고 계신 것 같아서 내맘대로 또 조금 안심했다. 해선배우는 전에는 난넬로만 만났던 터라 소극장에서의 시선 처리가 참으로 좋으시구나라는 걸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을 곧게 바라볼 줄 아는 배우는 참 근사하다.

태구배우는 1막보다 2막이 안정적이셨던 걸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 좋아지시겠지.'라는 마음?

태구배우 특유의 약간 들뜬 느낌의 톤이 있으신데 그 부분은 사실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현재까지는 그 들뜸이 본인이 그동안 맡은 젊은 역할들에는 또 장점으로 작용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해서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1막 레이니와의 대립씬에서 '왜 대사를 저기에서 끊으시지?'하고 조금 의아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뭐 배우들은 프로이니 다들 알아서 자기들이 잘 해결하시겠지만 본인이 대사치는 걸 다 통으로 녹음해서 귀로만 들었을 때 어색하지 않게 하시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2막은 그런 부분 없었으니 나보다 뒷 회차 보시는 분들은 아예 안 느끼실지도.

엘렌과 워커는 극 안에서 대립각이 확실히 서있다기에는 또 둘이 레이니를 대하는 태도 등을 볼 때 겹쳐지는 구석도 있어서 젊고 패기 넘치는 큰 남성인 태구배우가 그 에너지 자체로, 노련한 중년 여성인 해선배우와 부딪칠 때면 그 차이와 오묘한 동질성이 나타나는 부분이 그 자체로 좋았기에 평이 이렇게 후해지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난 이 극에서 레이니와 마이클의 관계에서 많은 감정을 느꼈지만 공적이지 않은 자신을 레이니에게 보이고 싶어할 때가 있는 엘렌과 친구같지만 그 누구보다 공적으로 레이니에게 압박적일 때가 있는 워커를 보는 것도 재밌었다.

연출이 저번 작년 필로우맨을 연출한 이인수 연출이던데 고요한 느낌이 내 감성하고는 잘 맞았다.

다음 연출은 어떻게 하실 지 궁금하네.




댓글